통일사상의 종교관에 관한 연구: 다원주의와 통일주의의 평화적 공존을 향하여

청심신학대학원대학교 황진수

I. 들어가며

II. 통일사상의 종교관은 신 중심 다원주의인가?

III. 다원주의와 통일주의의 평화적 양립과 공존

IV. 나가며

I. 들어가며

통일사상은 문선명 선생의 말씀에 담겨 있는 세계관을 사상적으로 정립한 것으로서, 그 안에는 철학사 전반의 흐름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흐름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통일의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통일을 지향하는 통일사상의 근저에는 주지하다시피 문선명 선생의 사상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신관이 자리 잡고 있다. 신관은 철학적 양상과 더불어 그러한 신관을 추종하는 종교적 맥락 속에서 함께 다루어질 때 그 의미가 확고해 질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통일사상이 내포하고 있는 신관을 종교적 맥락에서 조명해보고, 특히 통일사상의 신관이 종교 간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가에 대해 논의해 볼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통일사상의 종교관이 오늘날 종교다원주의가 안고 있는 상대주의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지에 대한 여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통일사상의 종교관의 기본 전제는 역시 유일신관을 갖고 있는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존재이다. 인류의 영적, 정신적, 문화적 기저에서 강한 생명력을 발휘하며 인류 역사를 이끌어온 다양한 종교들의 배후에 모든 존재의 궁극적 근원으로서의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해 왔음을 기본 전제로 제시한다. 다양한 종교들이 역사 가운데 생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을 거쳐 오면서 시대와 문화권의 차이에 따라 종교 간의 현격한 차이가 만들어져 왔지만, 종교들의 배후에 궁극적 존재로서의 절대자, 즉 하나님이 존재함으로써 종교들이 시대와 지역의 특성에 따라 인류의 정신을 선의 방향으로 계도하는 공통된 목적성을 공유해 왔다는 것이다.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초월적 절대자가 인류의 전체 역사 속에서 함께 하면서 시대와 지역의 특성에 적합한 종교성을 인간의 삶 속에서 발현시키며 인류를 선의 목적으로 인도해 온 것이다.

이와 같은 통일사상의 종교관은 종교의 보편성과 개별성의 긴장 관계를 해소하고 양 쪽의 양상을 공존시키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종교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절대적 공유하는 한, 종교들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보편적 공통 기반그것이 신앙심이나 사랑, 이타심 등 무엇이든 간에을 발견하고 서로의 동질성을 깨달으며 조화와 통일, 화해를 꾀할 수 있다. 또한 종교는 오래 시간 상이한 시대적, 지역적 문맥을 토대로 발전해왔기 때문에 한 종교의 진리 체계가 다른 종교의 그것을 단순히 자신의 것으로 환원하려 하거나 성급히 일반화할 수 없는 각 종교만의 독특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개별성을 옹호하는 차원에서는 무분별한 종교혼합주의(religious syncretism)를 지양해야 하며, 보편성을 인정하는 차원에서는 종교 간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타종교에 대한 불가지론을 펼치거나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와 같이 종교 간의 같음과 다름이 양립될 수 있는 변증적 관계를 통일사상의 종교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혹자는 20세기 중후반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히 논의되었던 신 중심 다원주의(God-centered Pluralism)를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존 힉(John Hick)이나 윌프레드 칸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등이 주축이 되어 펼쳤던 신 중심 다원주의의 특징을 거칠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현상적으로는 상호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함, 특유성을 지닌 종교들일지라도 인간의 유한한 인식이 파악할 수 없는 영역에서 실존하는 궁극적, 초월적 존재가 각 종교 혹은 종교적 경험에 내재하고 있어서 각 종교는 나름의 진리성을 내포하고 있는 참된 종교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각 종교가 그러한 초월적 존재를 공통 기반으로 매개하고 있음을 깨달아 서로 화합하고 상생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신 중심 다원주의가 다원성을 견지하기 위해 내세우는 의 존재적/인식적 초월성은 통일사상의 종교관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다. 통일사상의 종교관은 신의 초월성이나 신의 경험에 대한 신비성을 강조하는데 그치지 않고, 신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입장을 확고히 하며, 신에 대해서 명확히 알려주는 종교일수록 참된 종교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논문은 신 중심 다원주의와 통일사상의 종교관을 비교 분석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규명함으로써 통일사상 종교관의 구체적 성격을 드러내는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통일사상이 내포하는 부모로서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종교들이 서로의 특유한 개성을 향유하면서도 인류의 평화를 선도할 수 있는 형제로서의 심정적 공통 기대를 형성해 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21세기의 핵심적 시대정신인 다원주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심정을 기반으로 한 통일주의의 흐름이 함께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원주의와 통일주의의 공존이라는 측면에서 통일사상의 종교관이 제시하는 평화의 한 해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II. 통일사상의 종교관은 신 중심 다원주의인가?

존 힉은 신 중심 다원주의의 관점을 철학적으로 정초한 인물로서, 칸트의 물자체(noumenon)와 현상(phenomena)을 구별하는 도식을 차용하여 각 종교는 궁극적 실재(the Real)가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권에서 현현(manifestation)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는 종교 간의 관계에 있어서 이제까지 자기 종교의 창시자를 중심으로 배타적으로 진행되어왔던 전례를 넘어서 초월적 신(실재)을 중심으로 종교의 다원적 위상을 정립해야 한다고 보고, 이를 천동설에서 지동설에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자평했다. 윌프레드 칸트웰 스미스 또한 존 힉과 마찬가지로 초월적, 궁극적 실재가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 것이 종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앙심을 종교의 본질로 보고, 각기 다른 종교적 전통은 이 신앙심이 다양한 문화권에서 독특하게 발전하면서 제도와 교리 등으로 축적된 결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종교라는 제도적 전통이 먼저 존재한 것이 아니라, 초월적 절대자와 관계 맺는 인간 고유의 신앙심의 발로가 독특한 시대적, 지역적 문맥을 토양으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면서 종교라는 제도적 형태로 축적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힉과 스미스의 주장의 공통점은 오늘날 세계의 종교들이 종교의 정의를 내리기 힘들 정도로 서로 상이한 구조와 내용을 지니고 있을 지라도 종교의 본질로 들어가면 궁극적인 공통 기반, 즉 초월적 실재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통일사상의 종교관도 한 분이신 초월적 절대자가 인류를 선의 방향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 시대와 지역적 특성에 맞는 종교를 중심으로 문명이 발전하도록 이끌었다고 본다. 하나의 목적성을 공유하는 종교의 궁극적 본질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그 목적성에 따라 각각의 종교가 수행해온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위에서 언급한 신 중심 다원주의와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고 있는 바이다. 같은 맥락에서 힉이 존재론적으로 접근하고, 스미스가 인간의 근본적 신앙심이라는 차원에서 본성론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면, 통일사상의 종교관은 양자를 아우르는 목적론적(teleological)인 차원에서 신의 구원섭리를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1990년대 초 가정연합의 지원 하에 국제종교재단에서 출판한 세계경전의 서문을 보면 신 중심 다원주의의 기본 맥락을 인식하고 어느 정도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음의 구절들은 그러한 해석의 단서를 제공한다. 모든 종교의 신학자들은 타종교의 긍정적 가치들을 인식하고 초기의 편견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모색하고 있다. 이름은 다르게 불린다고 하더라도 신, 혹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탐구가 모든 종교의 뿌리라는 것이 광범위하게 인식되고 있다.” “오늘날 세계 신학에 대한 요청이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존 힉, 레이문도 파니카 등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그들은 종교는 규격화되고 일관된 철학적 체계가 아니라고 말한다. 특정 종교가 어떤 면에서 탁월한 해답을 줄 수도 있지만, 문화의 기초로서의 종교는 인간 경험의 모든 측면을 충분히 알려줄 수 있도록 광범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서문은 문선명 선생의 직접적인 언명은 아닐지라도,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는 가정연합의 종교 간 관계에 대한 신학적 지평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 요컨대, 문선명 선생과 가정연합은 존재의 근원으로서, 그리고 인간 경험의 근원적 뿌리로서 실재하는 초월적 절대자를 중심으로 모든 종교는 서로가 형제 종교임을 깨닫고, 교리적 논쟁과 다툼을 넘어서 서로를 참된 종교로 받들며 세계 평화를 위해 앞장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통일사상의 종교관과 20세기 후반 신 중심 다원주의를 지지하는 신학자들의 지평이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종교의 본질과 종교 간의 관계에 대한 통일사상의 관점이 신 중심적 다원주의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통일사상의 종교관을 더 극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신 중심적 다원주의와 어떻게 다른지를 조명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신 중심적 다원주의가 말 그대로 다원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초월적 신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 어느 한 종교의 교리나 가르침으로 완전히 환원되거나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게 된다고 한다면 진리의 배타적 독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진리를 품고 있는 종교는 참된 종교가 되고, 다른 종교들은 진리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열등한 종교, 더 나아가 거짓종교로 전락하고 만다. 따라서 종교의 수평적 다원성을 지켜내기 위해 힉과 스미스, 레이문도 파니카(Raimon Panikkar) 등이 공통적으로 취하는 방식은 신에 대한 완전한 앎에 이를 수 없는 인간의 유한한 인식 능력을 강조하면서 신의 존재를 초월적 영역으로 이관하고 신에 대한 경험을 사변적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신비적이고 전체적(holistic)인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종교의 수평적 다원성을 견지하기 위해 신 중심 다원주의가 필연적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는 신의 초월성, 신의 경험에 대한 신비성이 신 중심 다원주의가 이제껏 비판받아온 핵심 근거가 되어왔다는 점이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의 인식이 다다를 수 없는 초월적, 신비적 영역에서만 신을 만날 수 있다면 각 종교 또는 종교적 경험이 신의 현현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없고, 왜 그렇게 현현하는 지에 대한 이유는 더욱이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그렇게 상정된 초월적 신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를 갖고 있지 않은 종교는 이러한 종교신학적 지평에 동의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비평가들은 존 힉의 논리 속에서 유일신관에 기반을 둔 제국주의적 요소를 찾기도 하고, 기독교 포괄주의의 변형된 형태가 아니냐는 의심을 가중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통일사상의 종교관에 따르면, 종교의 이면에 존재하는 초월적 절대자의 섭리에 따라 선의 방향으로 인류를 계도하고 교육시킨다는 면에서 종교는 같은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종교의 본질적 의미, 목적이라는 관점에 한하여 세계적으로 인류 문명을 이끌어온 종교들이 동등한 가치와 위상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지, 신 중심 다원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종교가 신의 존재로부터 무한한 인식의 거리(infinite epistemic distance)를 두고 있어서 펼치는 내용의 가치가 다 똑같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통일사상은 신에 대해서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있다는 입장을 확고히 하며, 신에 대해서 명확히 알려주는 종교일수록 참된 종교임을 강조한다. 즉, 세계 종교가 인류를 선의 방향으로 이끄는 근본적 목적성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 선의 방향이라는 것이 결국 신에 대해 바르게 알고 신의 창조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볼 때, 그러한 신의 뜻을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내는데 있어서 섭리적 단계에 따라 종교마다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최후의 심정세계를 연결시킬 수 있는 종교는 하나님이 제일 불쌍하다는 것을 세밀히 가르쳐 주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좋고 훌륭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불쌍하고 억울한 하나님, 분통하고 한이 넘치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세밀히 가르쳐 주는 종교가 나와야 됩니다. 그래야 효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슬픈 하나님을 모를 때에는 해방시켜 주는 하나님, 심판하는 하나님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종교가 나와야 역사적인 종교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요,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종교가 나와야 시대적인 종교의 사명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가르쳐 주고 그런 심정을 통할 수 있게 해서 그 심정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위로할 줄 아는 종교를 만들어야만 그 종교가 끝날에 남아질 종교가 될 것입니다.

위의 구절을 살펴보면 문선명 선생의 종교관이 신 중심적 다원주의와 구조적으로 유사한 면이 있을지라도 결코 다원주의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종교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신의 섭리로서의 거대담론(meta-narrative)을 제시하고 있고, 그러한 담론의 준거를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 가장 가깝게 가르쳐 줄 수 있는 특정 종교, 즉 가정연합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사실 다원주의보다는 포괄주의나 배타주의적인 지평에 가깝다.

오늘날의 종교들이 종교로서의 동일한 근본 목적을 공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성에 따라 신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혀야만 하는 종교의 사명을 놓고 볼 때 모든 종교가 동일한 선상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칼 라너(Karl Rahner)의 논리대로 궁극적인 진리가 명시화되고(explicit) 개념화되고(conceptualize) 주제화(thematize)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더 궁극적으로는 심정적인 차원에서 신의 심정을 얼마큼 드러내는 지에 따라 종교 간에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통일사상의 종교에 관한 지평 속에 다원주의적인 요소와 포괄주의적인 요소가 혼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일관된 해석이 필요할 것 같다. 한편으로는 각 종교들이 신봉하는 인격적/비인격적 궁극적 실재가 한 분이신 하나님의 다른 이름일 뿐임을 분명히 하고, 종교들이 시대적, 지역적으로 특화된 양상으로 인류의 심령(心靈)을 성장시키는 역할을 해왔다고 보는 점 등에서 하나 이상의 종교들의 됨을 인정하는 다원주의적 요소를 분명 지니고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각 종교가 시대와 지역의 특성에 맞추어 인류를 계도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시대적, 지역적으로 특화된 종교의 심정, 혹은 영성이라는 것이 결국 신과 사랑으로 하나 되는 신인애일체(神人愛一体)의 참된 인간을 이끌어내는 매개적 방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무엇이 다원성을 갖느냐는 물음에 있어서 근본 목적을 이루기위한 방편이 다원성을 갖는 것이지, 그 방편들이 추구하는 본질적 지향점 자체가 다원성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인애일체라는 하나의 지향점으로부터 거꾸로 각 종교들의 가르침을 바라볼 때, 어떤 종교가 과연 이 신인애일체를 위해 반드시 체휼해야만 하는 신의 감추어진 심정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지에 대한 평가가 가능할 수 있다는 논리가 나온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존 힉이 주장하는 것처럼 종교가 점차 자기중심적에서 실재 중심적인 지향성을 갖느냐는 식의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기준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궁극적 실재의 깊은 인격적 내면을 심정적으로, 즉 지(知)적으로, 정(情)적으로, 의(意)적으로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내용과 형식 모두를 갖추었느냐에 달려 있다.

신 중심적 다원주의를 설명할 때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모델인 하나의 산 정상으로 향하는 여러 가지 길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산 정상에 가장 가깝게, 그리고 가장 먼저 도달한 종교가 산 아래를 바라보면서 산 정상을 향하고 있는 많은 길들 중에 어떤 길이 너무 에둘러 가지 않고 정확하게 산 정상으로 이끌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산 정상에 가장 먼저 도달한 종교가 만든 길이 산 정상으로 향하는 최고, 최선의 길임을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더 나아가 다양한 길(종교)들을 연결해주고 길목마다 표지판을 세워줌으로써 산 정상으로 갈 수 있는 포괄적인 로드맵을 제공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통일사상의 종교관은 하나의 산 정상을 향하는 다양한 길이라는 신 중심적 다원주의의 구조를 취하면서도 산 정상에 먼저 도달한 종교가 다른 종교들의 길을 연결하고 포용할 수 있다는 포괄주의적 양상을 함께 아우르고 있다.

에베레스트 산정을 중심삼고 볼 때 수많은 산들이 전부 그것을 주봉으로 해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레스트 산정 하나를 만들어 놓음으로써 연봉으로 이뤄진 산맥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도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역사시대에 공헌했다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렇게 연결된 봉우리들이 합해서 에베레스트 산정을 추앙할 수 있는 기준에 속해 있는 것같이 종교권도 그와 같아야 저나라에 가서 해방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주봉이 없는 상황에서 연봉이 아무리 자기주장을 내세운다고 해도 그것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종교권을 묶어서 신의의 시대로 갈 수 있는 새로운 종교는 역사와 더불어, 그리고 시대와 더불어 막연하고 관념적인 하나님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생활 이면의 동기적 요소로서 생활의 행동을 제재하고 주도할 수 있는 종교 배경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종교해방이 이뤄지게 됩니다.

이렇게 신 중심적 다원주의에서 포괄주의로 이어지는 흐름은 가정연합의 구원에 대한 개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원리강론에 따르면 병든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병들기 전의 상태로 복귀시킨다는 뜻이요,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한다는 것은 곧 빠지기 전의 입장으로 복귀시킨다는 뜻이다. 따라서 종교에서 말하는 죄로부터의 구원은 죄를 짓기 전, 즉 죄가 없는 창조본연의 입장으로 복귀시킨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인류를 죄가 없었던 시점으로 되돌리려는 가정연합의 구원관은 두 가지 양상을 지니는데, 하나는 점진적 구원이며 또 하나는 결정적 구원이다. 전자는 타락 이후 급격히 추락해버린 인간의 심령과 지능을 점진적으로 성장시켜서 영인체를 타락 이전까지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고, 후자는 인류의 부모로 오는 메시아를 통해 타락으로 인한 악의 혈통을 근절하고 하나님을 중심한 선의 혈통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즉, 점진적 구원은 타락 이전까지의 수준까지, 그리고 결정적 구원은 그 타락의 흔적을 지우고 완전한 신인애일체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관문을 여는 것이다.

이러한 점진적 구원과 결정적 구원은 위에서 언급한 신 중심적 다원주의와 포괄주의의 맥락과 그대로 연결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인류 역사 속에서 세계 종교는 신의 섭리에 따라 시대와 지역에 맞게 인류의 점진적 구원을 인도해왔고, 가정연합이 주관하는 축복의 의식을 통해 결정적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점진적 구원이라는 맥락에서는 세계 종교의 수평적인 참됨을 인정함으로써 다원주의적 요소를 드러내고, 결정적 구원의 맥락에서는 세계 종교의 점진적 구원을 갈무리하여 새로운 장을 여는 가정연합의 특별한 (혹은 배타적) 지위를 인정함으로써 포괄주의적인 요소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통일사상의 종교관에는 배타주의적인 요소는 없는 것인가? 기본적으로, 종교들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실존을 주장하는 통일사상의 종교관에는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발견하기 힘들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 모든 것을 물질로 환원해버리는 유물론과 이들 사상을 배경으로 한 공산주의에 대해서 통일사상은 강하게 부정하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통일사상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유물론과 공산주의는 마치 하나의 산 정상을 오르는 여러 가지 노정 중에 낭떠러지로 향하는 길과 같기 때문에 그 길을 막아서야만 하는 배타적 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배타적 태도는 관계의 영원한 단절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의 회복을 위해 불가분적으로 필요한 과정으로 인식된다. 다시 말해서, 낭떠러지로 향하는 길을 막아선 이후에는 그 길을 그저 단절시키고 폐쇄시키는 것이 아니라 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로 연결시켜줌으로써 그 길을 따라가던 사람들을 포용해야 함을 의미한다.

III. 다원주의와 통일주의의 평화적 양립과 공존

종교는 어디로 가야 되느냐? 참된 부모의 인연을 찾아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문을 통과해서 본연의 인연, 즉 본연의 참다운 부모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를 복귀하려는 것이 지금까지 종교의 최종 목적입니다.

앞서 논의한 대로, 통일사상의 종교관은 존재의 근원, 본체(本体)으로서의 절대자, 즉 하나님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통일사상이 밝히는 하나님은 신 중심 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인식이 닿을 수 없는, 신비적, 직관적 경험으로만 체험될 수 있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지(知)·정(情)·의(意)의 뿌리가 되는 심정(心情)에서 그 누구보다도 가깝고 친밀하게 공명될 수 있는 존재다. 통일사상은 이러한 심정의 꼴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그것임을 밝히고, 예수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abba)로 고백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인류의 부모로서 드러낸다.

이러한 통일사상의 신관은 인류의 역사를 주도해온 종교들이 하나님과 인류가 부모와 자식의 불가분적 심정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신의 섭리적 방편이었다는 사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부모이신 하나님은 자식으로서의 인류를 대하는데 있어서 차별을 두지 않고, 전 지구성에 걸쳐 인류의 문명이 이루어온 발자취마다 그 시대와 지역에 맞는 종교적 진리와 영성의 길을 따라 인간의 심정을 길러 온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세계적 종교들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같은 지향점을 가리키고 있다. 그 지향점이 종교에 따라 인격적인 신을 가리킬 수도 있고 비인격적인 원리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그 차이는 부모로서의 하나님의 인격을 가리키는 것이냐, 혹은 부모로서의 하나님이 지니고 있는 내적 원리,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냐의 차이일 뿐 통일될 수 없는 근본적 차이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정초하고 그 관계의 속성을 심정적 관계로 규정하는 것은 이제까지 가톨릭 신학과 개신교 신학이 각각의 신학적 특색으로 내세웠던 신과 인간 사이의 존재의 유비(analogy of being)신앙의 유비(analogy of faith)의 맥락과는 구별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닮기(imitatio Dei)의 근간을 단순히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서의 자격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고, 또한 변질된 인간성에 실망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총과 그에 따른 신앙에서만 그 닮음의 기준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포괄하면서 하나님의 심정과 인간의 심정이 부자의 관계 속에 사랑으로 서로 충만하게 차오름을 지향하는 심정의 유비(analogy of heart)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통일사상의 유일신관에 입각한 종교관은 바르트의 우려를 피할 수 있다. 즉, 종교의 가르침을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성도 맺지 못한, 인간의 이기적 동기로부터 투영된 우상 숭배로서 부정하거나 배척할 필요가 없다. 각 종교의 가르침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심정을 함께 찾고, 그렇게 연결된 심정의 고리를 통해 서로 형제애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모든 종교인들에 요구되는 대화의 자세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류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내 하나님인 동시에 인류의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인 동시에 세계적인 하나님이요, 세계적인 하나님인 동시에 하늘땅의 하나님입니다. 그와 동시에 우주적인 부모입니다. 세계에는 하나님을 부르짖는 교파가 많습니다. 그러나 교파권 안에서 부르짖는 하나님은 이제 필요 없습니다. 교파를 초월하여 온 천지의 중심으로 믿으며 부를 수 있고, 전체를 대신하여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존재들이 모여야만 이 땅 위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부모로서의 하나님을 모시고 모든 종교인들이 초종교적, 초교파적인 형제자매의 심정적 관계를 형성하자는 통일사상의 이러한 메시지가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의 시대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물론 표면적으로 볼 때 한 종교의 신관으로 모든 종교를 아우르는 메타 담론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다원주의의 문맥을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통일사상의 초종교 평화사상이 오늘날 종교다원주의가 강조하는 종교 간의 상호 존중, 협력, 관용, 화해, 축제의 맥락을 근본적으로 지지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다원주의가 지향하는 바는 종교와 종교가 서로 소모적이고 배타적인 투쟁을 멈추고,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는 가운데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며, 궁극적으로 인류의 평화를 위해 상생할 수 있는 지혜를 모색함에 있다. 통일사상의 종교관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아니 단순히 지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러한 화합의 장을 지속시킬 수 있는 궁극적 기반, 즉 부모로서의 신을 중심한 참사랑의 문화를 주창하고 있다.

혹자는 하나님을 공통 기반으로 내세우는 것에 대한 유일신관의 일방적 폭력성을 지적할 수도 있다. 보편적인 평화의 기준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아무리 그 의도가 좋더라도 배타주의적 폭력성의 위험을 내포하기 때문에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른 삶의 문맥에 초점을 맞추어 관계의 기반을 상대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오늘날과 같이 전 세계가 하나의 생활권으로 들어와 문화, 종교 등의 다양한 삶의 기반이 끊임없이 교차되는 다원주의 세계에서 이와 같은 주장은 일견 타당한 것이 사실이지만, 결국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없으면 다양성의 유지 자체가 불가능한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그 당위성의 근본 동력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성찰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종교다원주의의 맥락 속에서 이러한 동력은 각 종교마다 내세우는 아가페, 자비, 인의(義) 등 여러 가지 덕목으로 표현될 수 있겠으나, 분명한 공통점은 타인, 만물과 깊은 공감의 경지에서 상대를 위하려고 하는 위타(爲他)적 힘을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다양성을 인정하여 수평적 관계를 이룰 수 있는 그 위타적 지향성을 무엇이라고 부르던 간에, 그 힘이 지속적으로 종교 간의 관계를 평화적으로 인도하지 않고서는 종교다원주의가 기대하는 상호 존중과 관용의 기대는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얇은 살얼음판과도 같다. 따라서 그 힘의 궁극적인 근원을 찾아 평화의 보편적인 기대를 세우지 않고서는 진정한 다원주의 사회를 만들 수 없다는, 일면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통일사상은 이러한 힘의 근원을 부모이신 하나님의 참사랑이라고 규정한다. 사랑, 특히 부모의 사랑은 인류가 사해동포주의를 기반으로 형제의 심정을 나눌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부모의 사랑을 매개로 해서만이 개인과 집단의 고유한 개성을 존중하고, 다양성을 다양성 그 자체로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보편적 가치를 더욱 깊게 체화해 갈 수 있는 문화를 열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랑의 절대적 기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가인형 인생관과 아벨형 인생관의 끊임없는 상충과 대립 속에서 종교 간의 조화와 협력을 위한 움직임은 명확한 방향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그저 주변의 환경에 따라 임의적으로 결성되는 일회적이고 형식적인 이상주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변하는 세계 속에서 불변하는 사랑의 이상, 평화의 이상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역사를 통해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평화라는 말 자체가 일상적인 언어 사용에서 어색하고 허황된 느낌마저 갖게 하는 오늘날, 정치권력이나 사회적 위치 등의 외적 조건이 결부된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평화의 절대적 기준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종교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세속과 분리된 순수한 종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각의 종교는 자신이 처해 있는 사회적 위치(social location)와 연계된 세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따라서 인간 중심의 종교연합운동, 평화운동은 대부분 스스로가 세운 상대적이고 모순적인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통일사상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오직 부모이신 하나님의 참사랑만이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기준, 즉 항구적 평화를 안착시킬 수 있는 사랑의 절대적 근원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렇게 부모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종교들이 형제로서의 심정적 유대 관계를 맺어가는 세계 안에서는 다원주의와 통일주의(unificationism)가 서로 양립될 수 있고 공존할 수 있는 맥락을 만들어낸다. 통일사상의 통일이라는 개념은 개성을 무시한 채 일방적인 전체주의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없는 각각의 개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서로 잘 주고 잘 받음으로써 조화로운 관계성을 이룰 때 실현될 수 있는 개념이다. 문선명 선생은 통일의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평화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평화라고 하는 것은 그 문자 그대로 평평하다는 거예요. 평평하게 되어서 화하는 것입니다. 본질이 변화해서 변화되는 것은 화학의 화(化)를 쓰지만, 이 화할 화(和)자입니다. 본질 그대로를 중심삼고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일화(一和)의 화입니다.

이를 부모와 자식의 패러다임으로 바라보면 더 직관적이다. 모두가 독특하고 특별한 개성을 지닌 자녀의 입장에서 자신의 활동의 뿌리, 원인, 동기를 부모이신 하나님의 심정과 공명하며 살아간다면, 이러한 세계에서는 개개인의 뚜렷한 개성이 모두 신성(神性)한 가치의 현현이므로 함부로 타인의 개성을 맞고 틀림의 기준으로 배척하거나 특정한 하나의 범주 안에 일방적으로 포괄할 수 없다. 한 자녀를 다른 자녀로 대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정한 다원주의란 이렇게 자녀로서의 개개인의 유일무이성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개인의 고유성의 가장 깊숙한 기원(orientation)에는 부모이신 하나님의 심정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지극한 다원주의 세계는 하나님의 심정을 공유하는 지극한 통일주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다원성과 통일성의 관계는 결국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닌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오늘날 종교 다원주의의 추세는 신 중심 다원주의를 넘어 종교 간의 공통 기반을 배제한 채 차이를 강조하는 수용 모델(acceptance model)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모델의 사상적 흐름을 정초한 인물로 루드비히 비트켄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을 꼽을 수 있고, 조지 린드벡(George Lindbeck)이나 D. Z. Phillips 등이 그의 언어 철학을 계승하여 이러한 다원주의의 흐름을 공고히 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비트켄슈타인이 어떤 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본질주의에 대항하여 언어 문화적 맥락에 따른 다양성을 강조하려고 할 때 내세운 상징적 표현이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라는 것이다. 이를 종교 공동체에 적용하면, 종교들 간에 어떤 개념적 유사성,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보편 개념이 있어 보일지라도 각 공동체가 일구어온 특유의 언어 문화적 맥락으로 인해 각 종교가 표방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은 어떤 공통 기반으로서의 본질로 수렴될 수 없는, 상호 환원 불가능한(irreducible) 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비트켄슈타인의 가족 유사성이란 개념을 조금 색다르게 바라보고자 한다. 통일사상의 종교관에 입각해서 볼 때, 이 가족 유사성이란 말은 실로 종교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비트켄슈타인의 철학적 통찰에 따라, 각 종교는 역사적 전통을 형성하며 어떤 단순한 도식에 따라 쉽게 일반화되고 보편화 될 수 없는 사유의 깊이와 개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실제 가족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독특한 개성적 존재로서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 아무리 쌍둥이로 태어나더라도 상호 환원되거나 치환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이 서로 유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생명의 기원, 즉 부모의 존재와 불가분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존재적 유사성(유전자)이나 언어, 문화, 사상적 유사성을 넘어, 그 유사성의 기원이 인간의 존재 및 그 문화의 방향성에 총체적으로 내재하는 심정, 즉 부모의 심정으로부터 비롯된다면,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가 지닌 독특한 개성의 가치를 충분히 누리는 가운데 가족으로서의 심정적 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IV. 나가며

이제까지 통일사상의 종교관을 종교신학적 맥락에서 다루어 보았다. 통일사상의 종교관은 무엇보다도 종교들의 궁극적 공통 기반으로서의 신의 존재를 강조한다. 다양한 종교들이 역사 가운데 생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을 거쳐 오면서 종교 간의 현격한 차이를 만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섭리에 따라 시대와 지역의 특성에 맞추어 인류의 정신을 선의 방향으로 계도하는 근본 목적을 공유해 왔음을 부각시킨다. 또한 점진적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종교의 사명이라는 차원에서 하나 이상의 종교들의 참됨을 인정하는 점 등을 볼 때, 신 중심 다원주의의 지평과 어느 정도 그 궤를 함께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통일사상의 종교관은 신 중심 다원주의가 다원주의로서의 정체성을 견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는 신의 초월성이나 신의 경험에 대한 신비성을 강조하는데 그치지 않고, 신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입장을 확고히 하며, 신에 대해서 명확히 알려주는 종교일수록 참된 종교임을 강조한다. 즉, 세계 종교가 인류를 선의 방향으로 이끄는 근본 목적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러한 신의 뜻을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내는데 있어서는 종교마다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종교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신의 섭리로서의 거대담론을 제시하고 있고, 그러한 담론의 준거를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 가장 가깝게 가르쳐 줄 수 있는 부모 종교로서의 가정연합에서 찾고 있으며, 또한 축복결혼이라는 결정적 구원의 맥락에서 세계 종교의 점진적 구원을 갈무리하여 새로운 장을 여는 가정연합의 배타적 지위를 인정함으로써 포괄주의적인 요소를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통일사상의 종교관은 하나의 산 정상을 향하는 다양한 길이라는 신 중심적 다원주의의 구조를 취하면서도 산 정상에 먼저 도달한 종교가 다른 종교들의 길을 연결하고 포용할 수 있다는 포괄주의적 양상을 함께 아우르고 있다.

통일사상이 내포하는 하나님은 신 중심 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인식이 닿을 수 없는, 신비적, 직관적 경험으로만 체험될 수 있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지(知)·정(情)·의(意)의 뿌리가 되는 심정(心情)에서 그 누구보다도 가깝고 친밀하게 공명됨으로써 인간의 총체적 의식과 행동의 목적과 방향을 일깨우는 존재다. 통일사상은 이러한 심정의 꼴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그것임을 천명하고, 예수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abba)로 고백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인류의 부모로서 드러낸다.

이렇게 부모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종교들이 형제로서의 심정적 유대 관계를 맺어가는 세계 안에서는 다원주의와 통일주의가 서로 양립, 공존할 수 있는 맥락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통일이라는 개념은 개성을 무시한 채 일방적인 전체주의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없는 각각의 개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서로 잘 주고 잘 받음으로써 조화로운 관계성을 이룰 때 실현될 수 있는 개념이다. 모두가 독특하고 특별한 개성을 지닌 자녀의 입장에서 자신의 활동의 뿌리, 원인, 동기를 부모이신 하나님의 심정과 연결시킬 수만 있다면, 개개인의 뚜렷한 개성이 모두 신성(神性)한 가치의 현현이 되므로 함부로 타인의 개성을 맞고 틀림의 기준으로 배척하거나 특정한 하나의 범주 안에 일방적으로 포괄할 수 없다. 이와 같이 통일사상의 종교관 안에서는 지극한 다원주의적 지평과 통일주의적 지평이 서로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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